센터에서 근무하다보면 거의 대부분의 신규 내담자와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고 또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참 쉽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가족을 정신병자로 취급한다며 비난받기도하고 척도검사 결과 심각한 수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이겨내보겠다며 더이상의 개입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거짓으로 상담에 임하는 경우도 참 많죠. 그럴때면 상담자로서 지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멘탈싸인이라는 책을 읽다가 부정(Denial)편을 보고 부정의 기제에 대해 한번 정리하는것이 내담자에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부정하는 이유와 부정으로 인한 재발의 위험성, 그리고 치료유입을 위한 대처방법에 대해 한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본 글은 <멘탈싸인_제임스 휘트니 힉스>의 부정(Denial)편을 토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부정의 정의
부정이란, 환자 자신의 질병이나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병식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즉, 자신의 질병에 대해 실제보다 적게 혹은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지요. 조현병 환자의 1/3은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극성장애, 우울증, 범불안장애 환자의 1/4 정도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과에서는 병식을 치료과정에 있어 중요한 척도로 보고있는데요, 그 이유는 병식이 낮을수록 치료받기까지 시간이 매우 오래걸리고 치료를 받더라도 자의중단할 위험이 높아 재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반면 병식이 높은 경우(자신의 질병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자신의 증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경우)는 재발의 징후를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하고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아 증상을 빠르게 완화할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의사에게 진단받지 않은 사람들 중 90% 이상이 스스로 병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람들은 정신과적 질환을 부정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정신과 질환을 부정하는 이유
조현병
조현병의 초기 증상으로 편집증적(피해의식, 피해망상)인 행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꾸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해코지하려 든다고 생각하는데서 출발하게 되죠. 게다가 환청으로 '저 사람이 너를 해치려 들거야.', '널 죽일거야.'라는 소리가 들리면 이러한 상황이 질병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매순간 놓여있기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현병의 증상은 피해사고, 환각 등으로 개인이 처음 경험하기에 너무나 혼란스럽고 현실검증(reality test)을 하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어서 치료로 유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망상
망상의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종교적망상, 과대망상, 피해망상, 관계망상 등 이러한 망상은 급성 정신병 에피소드에서 부정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망상의 특징은 현실검증이 어렵다는 것인데요. 현실검증의 예시를 들면 A가 "방금 지나간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라고 주장했을때 주변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반박하면 "그렇겠지? 내가 잘못생각한거같아. 착각했나봐"라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는 상태를 현실검증력이 높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망상의 경우 현실검증력이 낮기때문에 A가 "방금 지나간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라고 주장했을 때 주변에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그 믿음이 수정되지 않고 지속되며 오히려 반박당했을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망상은 처음 발병 시 현실검증력이 낮은 것이 특징이므로 정신과치료의 빠른 유입이 어렵습니다.
뇌 전두엽 손상
조현병은 뇌의 전두엽에 손상을 일으킵니다. 때문에 자신을 인식하고 합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의 손상으로 질병을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자신의 병을 인지하는 것은 지능이나 교육수준과는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양극성장애
양극성장애는 조증과 우울 에피소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장애인데요, 특히 조증 상태에서 기분이 고양되고 행복감을 느끼며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조증 상태에서 타인은 괴로울지 몰라도 자신은 행복감에 휩싸여있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자신의 능력을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조차도 약을 끝까지 먹는것을 싫어한다.
정신건강전문요원 자격을 가진 저도 약이라면 무엇이든 기피하게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과에서 항생제를 처방해주어도 끝까지 다 먹는 경우가 드물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병을 어느 정도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병이 생겼다고 인정하게 되면 건강한 식사, 일정한 투약, 카페인이나 술담배 금지, 꾸준한 병원 진료 등 일상생활의 변화를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타인을 평가하는데 익숙합니다. 자신이 타인을 볼 때 '왜 저사람은 저렇게 이상하게 생각할까?', '왜 치료를 받지 않을까?'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작 타인은 병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놓을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일 수 있습니다. 부정은 받아들일 수 없는 욕구나 두려운 현실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라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부정으로 인한 재발의 위험성
부정이 위험한 이유는 정신과적 증상의 재발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조현병 환자의 상당수가 처음 치료를 받고 증상이 완화되면 자신은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재발위험성이 높은 질환임을 부정하여 결국 재발하는 케이스가 참 많습니다. 환자 본인 뿐 아니라 환자의 가족들마저 증상을 부정하여 치료 개입이 더뎌지는 안타까운 경우도 참 많습니다.
조현병 환자의 절반이 치료를 시작하고 1년 이내에 약물치료를 중단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물을 자의적으로 중단한 이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재발을 경험합니다.
양극성장애에 걸린 환자가 만약 약물치료를 중단한다면 1년 이내에 조증이 재발할 확률은 50%나 되며 25%는 우울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몇 개월 이내에 재발을 경험합니다.
우울증 환자 중 1/3이 항우울제를 중단한 지 1년 이내에 재발한다고 합니다.
정신과적 질환은 재발하는 경우 증상이 이전보다 더 심해질 수 있고 이전에 비해 치료받아야하는 기간이 늘어날 수 있어 꾸준한 약물치료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치료유입을 위한 대처 방법들
상담자의 역할
자신의 병을 부정하는 환자는 오히려 치료를 강요하는 자에게 적대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때문에 치료를 권유할 때 내담자가 자신을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은 환자의 치료과정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재발이 되었을 경우, 내담자가 병으로 인해 과거에 어떤 지경에 이르렀으며 상태가 어땠는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설명해주고 꾸준히 치료를 받던 당시에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사제 고려
알약을 빼먹거나 먹었다고 거짓말을 종종 하는 경우, 주사제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주사제는 2주나 4주마다 한 번씩 맞도록 되어있어 적어도 다음 진료일까지 환자의 체내에 남아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비자의적 치료유입 방법 고려
설득에도 증상이 악화되어 자타해의 우려가 높고 자발적으로 치료적 유입이 불가할 경우에는 강제입원(비자의적 입원유형)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과 입원 유형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으니 참고부탁드립니다.
이상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는 부정에 대해 알아보았고 부정의 위험성, 대처 방안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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